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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은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광역시와 그 인근의 담양군, 화순군에 걸쳐 약 30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선사시대 이래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그대로 담고 있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무등산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고대 문헌은 『삼국사기』로서 거기에는 武珍岳이라 기록되어 있고 무등산이라는 명칭은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고대시대 이후에도 기존의 무진악이나 瑞石山을 비롯한 몇 가지의 명칭들이 무등산이라는 명칭과 함께 쓰이다가 근세부터 무등산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무등산의 북쪽에 자리잡은 광주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전남의 중심치소가 되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전남의 중심치소가 나주로 옮겨지면서 광주는 한동안 정체되었다가 1896년 다시 전남의 중심도시가 된 이후 지금까지 100여년간 꾸준한 발전을 계속하여 왔다. 무등산은 이와 같은 광주의 변천을 지켜보면서 산 자락 곳곳에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해 오고 있다. 현재까지 무등산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마한·백제의 고분을 비롯하여 300건이 넘는 문화유산들이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던 산성은 아직까지 그 흔적이 잘 남아 있고, 불교의 융성으로 증심사를 비롯한 수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불탑과 불상, 범종 등 많은 문화재들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남의 중심지가 나주로 옮겨졌지만 무등산은 국가의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독특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을 예찬한 전국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찾아 들어 무등산을 예술활동의 무대로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광주는 「藝響」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무등산에는 지금까지도 주옥같은 시가와 정자, 가마터, 회화, 글씨 등 수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 150만 광주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의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무등산이 갖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우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구국의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무등산에는 고려말 왜구를 격퇴하는데 큰공을 세운 정 지장군의 사당이 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당시 고경명장군과 김덕령장군이, 한말의 위기 때는 고광순 장군이 약하였으며, 일제하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1980년에 있었던 광주민중항쟁과 함께 무등산은 민주화의 성지로서 의향광주를 상징하는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무등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영욕 속에서 광주 시민들의 문화적 고향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어 광주 시민들과 삶의 고락을 같이 하는 살아 있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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